
안녕하세요. 밤샘입니다.
드디어 제가 가장 존경하는 유일한 선생을 소개하려 합니다. 제가 유일한 선생을 존경하는 이유는 너무나 많습니다. 아버지의 반대로 진학하지는 못했지만, 중학생 때 유한공업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을 정도예요. 언젠가는 유한대학에서 꼭 강의해보고 싶어요.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일한 선생은 기업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익 추구가 아닌 사회 전체의 이익을 생각했습니다. 흔히 '유한양행'의 창립자로 널리 알려진 그는, 기업 경영을 통해 얻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 해결에 기여하고자 평생을 헌신한 인물입니다. 자녀 세습을 하지 않고 전문 경영인을 세운 '유일한' 기업 총수입니다.
독립운동가, 민족의 정신을 지키다
유일한 선생의 업적을 이야기할 때 기업가로서의 성공과 사회 환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삶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바로 조국 독립을 향한 뜨거운 열정과 헌신적인 독립운동입니다. 기업가 이전에 그는 나라 잃은 설움을 겪으며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애국자였습니다.
유일한 선생은 대한제국 시절, 9세의 나이로 미국 유학을 떠나 자립했습니다. 미국에서 일제강점기를 맞게 된 거죠. 14세에는 박용만 선생의 소년병 학교에 들어가서 군사훈련을 받았고, 네브래스카주 헤이스팅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미시간 대학교에서 상업학을 전공하며 신학문을 배우는 동시에 재미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당시 미국 내 한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유일한 선생은 언론 활동과 자금 지원을 통해 독립운동을 후원했습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후원자를 넘어, 직접적인 독립운동 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1919년 3.1 운동 이후 재미 한인들이 조직한 '대한인국민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국제적인 연대 활동에 힘썼습니다. 또한, 재미 한인 사회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군사 훈련 단체인 '대조선국민군단'에 참여하여 독립군 양성에도 기여했습니다. 유일한 선생은 말로만 독립을 외친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행동으로 독립운동에 헌신한 것입니다.
미국에서의 학업을 마친 후, 유일한 선생은 잠시 귀국하여 국내 상황을 살피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감시가 삼엄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비밀리에 국내의 독립운동가들과 연락을 취하며 독립운동의 방안을 모색했습니다. 이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사업을 통해 얻은 수익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는 등, 끊임없이 조국 독립을 위한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유일한 선생의 독립운동은 그의 기업 경영 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가장 좋은 상품으로 국가와 동포에게 봉사한다'는 신념으로 유한양행을 설립하고 운영했는데, 식민지 백성들의 건강을 지키고 민족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했던 유일한 선생의 강렬한 염원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방 이후, 유일한 선생은 기업 경영에 매진하면서도, 교육과 사회 공헌 활동을 통해 독립운동 정신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교육 사업에 큰 관심을 가지고 인재 양성에 힘썼는데, 독립된 조국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를 키우는 것이라는 그의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유일한 선생의 삶은 기업가, 교육가로서의 면모뿐만 아니라, 뜨거운 조국애를 품고 헌신했던 독립운동가의 모습 또한 강렬하게 각인되어야 합니다. 그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가슴 깊이 새기고, 젊은 시절부터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했으며, 기업을 통해 얻은 부를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했기 때문입니다.
<독립운동가로서의 발자취>
○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 주도한 인물 중 한 명
○ 1942년 OSS(미국 전략첩보국 CIA 전신)에서 한국 담당 고문으로 활동
○ 1945년 OSS의 비밀 침투 작전인 '냅코 프로젝트'에 공작원으로 참여 - 50세 경
교육가, 민족의 미래를 설계하다
유일한 선생의 숭고한 뜻은 오늘날까지도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유일한 선생이 설립한 유한학원과 유한재단은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사회 곳곳에서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며 그의 정신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유일한 선생의 삶은 물질적인 성공뿐 아니라, 자신의 능력과 자원을 어떻게 활용하여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입니다.
사업으로 탄탄한 기반을 다진 유일한 선생은 돈보다 사람을 키우는 일에 더 큰 가치를 두었습니다. “교육만이 쓰러진 민족을 일으켜 세울 유일한 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는 1964년 사재를 털어 유한학원을 설립했습니다.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대학교를 통해 그는 미래 시대를 이끌어갈 정직하고 유능한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교육 철학은 지식 전달을 넘어, 사회에 봉사하고 국가 발전에 헌신하는 인격적인 인재를 키우는 데 뚜렷한 목표를 두고 있었습니다.
<교육가로서의 발자취>
○ 기업 이윤의 사회 환원을 통한 교육기관 설립
기업가,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돕다
유일한 선생의 경영 철학은 확고했습니다. 그는 기업의 목적을 단순히 이윤 추구에 두지 않고,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봉사한다'는 뚜렷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사업에 임했습니다. 이러한 철학은 유한양행이 오랜 시간 동안 국민들에게 신뢰받는 제약회사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값싼 수입 의약품이 난무하던 시절, 그는 국민 건강에 필수적인 의약품을 직접 생산하여 공급함으로써, 국민 보건 향상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매우 의미 있는 행보입니다.
또한, 유일한 선생은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며, 기업의 이익을 사회에 환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의 유언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함께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유일한 선생은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기증하여, 교육 사업과 사회복지 사업을 지원하도록 했습니다.
"너희들은 사회 교육을 제대로 받고,
사회에 나가서 각자 뜻하는 바를 이루며 살아라.
아버지의 유산은 사회에 모두 환원하여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도록 하라"
유일한 선생의 유서는 개인의 부를 사회 전체의 자산으로 돌리고, 미래 세대의 성장과 사회 발전을 위한 투자에 대한 깊은 신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딸 유재라 역시 죽기 전에 모든 재산을 유한재단에 기부했어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 강조되고, ESG 경영이 화두로 떠오르는 오늘날, 유일한 선생의 삶과 철학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기업의 존재 이유를 이윤 추구를 넘어 사회적 가치 창출에 두었으며, 자신의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함으로써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실천했습니다.
<기업가로서의 발자취>
○ 1936년 최초 주식회사 형태 도입: 개인 회사 형태에서 벗어나 현대적인 기업 경영 시스템의 기틀 마련
○ 1939년 최초 종업원 지주제 도입: 기업 이익을 직원들과 공유하고 주인의식을 고취하는 혁신적인 시도
○ 1962년 국내 두 번째 주식 공개: 기업의 투명성을 높이고 자본 시장 발전에 기여
○ 1969년 최초 경영권 승계 포기 및 전문 경영인 체제 도입
- 가족 중심의 경영에서 벗어나 전문 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는 선진적인 시스템 구축
- 한국 기업사에 큰 영향
유일한 선생은 진정한 '가치실현'이란 사회 전체의 발전과 공동체의 이익에 기여하는 데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줬습니다. 각 분야에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통찰력과 끊임없는 실천으로 한국 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죠. 유일한 선생이야말로 진정으로 존경받아야 할 '가치실현자'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앞으로도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은, 유일한 선생일 겁니다.

방문해주신 모든 분들, 고맙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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